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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역사
물론 이런 성공의 일부는 내용물이 지닌 호소력의 결과였다. 예를 들면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이탈리아에서는 할리우드라고 하면 무 쏠리니까 지도 관심을 가질 만큼 환상적인 현대성을 상징했다. 아름다움, 젊음, 그리고 호화로움이 재미라는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다. 지역의 판촉 전략은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삶과는 달랐던 이 세계의 놀라운 기쁨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현지 영화 산업은 미국이 장악한 배급망, 정부에서 새로 부과한 세금들, 수입해 들여온 미국 기술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서 주춤하던 터였다.
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미국의 지배를 설명하는 단순한 관리상의 세련됨이나 범세계적 소비자의 선호도라는 모든 개념을 복잡하게 만든다. 1914~18년 그리고 1939~45년의 전쟁은 유럽 전역의 민족적 작품의 제작을 완전히 중단시키거나 적어도 둔화시켰다. (이조들, 1988년, 61~63, 82, 118쪽) 구경하지 못한 많은 양의 미국 목록’ 이 쏟아져 들어갈 날을 기다렸고 (1945년 이후 4년 사이에 2천편의 극영화가 이탈리아로 건너갔으며) 그러는 사이에 미국의 해운 산업은 운송 하부구조를 발전시켰다. 1940년대에 할리우드가 새로 설립한 영화 수출국 Motion Picture Export Agency는 스스로 "작은 국무성"임을 자처할 정도로 미국 정책과 이념으로부터 동일한 방법론과 실행을 답습했다. (구백, 1987년, 92~93쪽)이 시기에는 또한 영화 산업의 자율적인 제작법이 성적인 불안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괴이한 논리에다 '다른' 국무성이 요구하는 대로 미국의 생활 방식을 전 세계에 전파해야 한다는 부담까지 추가해야 했다. (쇼츠, 1988년, 160쪽, 파우더메이커, 1950년, 30쪽) 주축국들이 보유했던 영화를 제작하는 국가 기구를 강제적으로 해체하는 작업은 반파시스트 및 반공적인 정치 목적과 할리우드의 이윤 계획에 동시에 잘 맞아떨어졌다. 따라서 순수한 경쟁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영화산업은 수십 년에 걸쳐서 세액 공제 혜택, 영화 위원회, 국무성과 상무성의 앞장서기, 현금 지원, 국내의 소도신 적 구매로부터 도움을 받는 한편, 미국 정부는 이념과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 영역인 영화 산업을 육성하고 유지하려고 엄청난 자원을 투입했다. (할 리, 1940년, 3쪽, 엘시서, 1989년, 10~11쪽)
국내에서 반독점법과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이윤이 타격을 받게 되자, 1950년대 할리우드로서는 세계 시장의 중요성이 점점 커졌다. (암수, 1987년, 49쪽) 제작, 배급, 상영의 소유권에 의해서 이루어진 수직적인 통합이 국내에서는 불법이 되었는지 몰라도,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1960년대에 이르자 미국은 영화 수입의 절반을 수출에 의존했다. 1970년대까지는 영국과 라틴 아메리카가 할리우드에는 가장 돈이 잘 벌리는 수입국들이었다. 두 경우 모두 경제적인 하락과 복합관에 대한 투자 실패로 입장객 수가 줄었다. 그 결과 할리우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관객의 발견’과 ‘흑인 우려먹기blaxploitation' 고유분야의 등장에서처럼 국내의 상업적 착취라는 새로운 형태로 관심을 돌렸다. 재벌에 의한 영화사 사들이기와 자본 재투자에 따라서, 세계 관객을 다시 확보하기 위한 전략들이 개발되었다. (마뜰라르, 1979년, 194) 미국 정부와 산업은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아프리카를 위해 특별 대행 기관들을 만들고, 어디에서나 영화를 판매하기 위한 기업 연합도 설립했다. 할리우드의 아프리카 영화 수출 회사가 영국 식민지였던 지역들을 지배하게 된 1960년대 이후로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1년에 350편가량의 영화가 상영되었고, 아마도 그 가운데 절반이 미국 영화일 것이다. (기어 와라, 1992년, 106쪽, 1994년, 385~6쪽, 우 카 디케, 1994년, 63쪽) 오늘날에는 아프리카 영화가 제작 국가에서보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상영되는 경우를 발견하기 훨씬 쉽다. 1970년대와 80년대의 초인플레이션 hyperinflation 이후 멕시코와 아르헨티나의 영화 제작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라틴 아메리카에서 상영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비율이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1980년대 중반은 일본이 해외 이윤의 주된 원천으로 떠올랐다. (힘 팰 리, 1996년, 52쪽, 오리건, 1992년, 304쪽)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지난 10년 사이에 조성된 새로운 개방적 다국적 투자 풍토로의 전환은, 매체 소유권의 사유화와 통일된 서유럽 시장과 구소비에트 진영에서 생겨난 돌파구와 비디오 녹화기의 확산을 통해 더욱 할리우드에 도움이 되었다. (엘시서, 1989년, 15쪽, 구백, 1987년, 98~99쪽, 와스코, 1994년, 220, 224쪽)
은 정부를 놀라게 했을까? 왜 통상의 균형에 대한 산업적인 문제들이 의미의 균형에 대한 문화적 우려와 결부되었을까? 그런 지배가 상징하게 된 '위협'은 무엇이며, 당장 시급한 문제들은 무엇일까?
문화적 제국주의
주변 국가들은 1천 년이 넘도록 서로 사상과 상품을 교환해왔다. 정보와 교역망은 유럽 제국주의의 노예제도, 군사주의, 기술력이 15세기에 그런 통로들을 쓸어낼 때까지 태평'양, 아시아, 지중해, 그리고 아프리카를 연결했다. 대륙 간의 통신은 연결 통로 역할을 맡았던 유럽에 의존하게 되었다. 인종적 우월성이나 기독교로의 개종이라는 사명 따위의 새로운 이념들도 생겨났다. (햄 링크, 1990년, 223~4쪽)>
하지만, 만일 리우즈에 의한 세계 시장의 경제적 지배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면, 왜 이러한 지배가 그토록 많았던 것일까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반응형